가톨릭교리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1요한 2,5)
전(前) 예비기간
예비신자들은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 시기는 예비신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됨으로써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초기 신앙과 초보적 회심이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세례성사를 받을 마음이 일어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와 첫 접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친교와 일치를 체험하는 시기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위기에 놓였을 때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 맙소사!” 하고 외쳤습니다. 어른들이 자녀들을 훈계할 때에도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늘’을 단순히 하늘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일찍이 하늘을 ‘하느님’이라고 불렀으며, 재앙을 피하고 복을 빌기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3-27).
타고난 종교적 심성 인간은 본래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해 하며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또한 인간은 진실하고 보람 있는 삶을 갈망하며 어쩌다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양심에 가책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나약과 부족을 스스로 알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의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좀더 절실하게 느낄 때 인간의 종교적 본성은 더욱 드러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불교, 유교, 개신교, 천주교 등 여러 종교들이 저마다 독특한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여러 종교들은 발생 기원과 교리, 조직 체계와 신앙 태도 등에서 비슷한 것들도 있지만 공통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명쾌하게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하나의 감정에 빠지는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철학적 인생관, 또는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는 도덕적 가르침이거나 신비적인 예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종교를 단편적으로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교란?
‘종교’(宗敎)라는 말을 풀어 보면 ‘종’은 모든 것의 중심을, ‘교’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 곧 ‘인생의 근본과 도리에 대한 가르침’ 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럽 언어에서 통용되는 종교(Religio)의 어원은 ‘인간이 하느님을 다시 인식한다’, ‘인간을 하느님께 다시 묶어 맨다’, 또는 ‘인간이 하느님을 다시 찾는다’는 의미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다시 찾는 것’ 또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확인하게 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자신의 근본을 알아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하느님 안에서 찾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참 종교의 조건
인간의 근본과 그 길을 하느님 안에서 찾는 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첫째, 종교는 이성을 초월할 수는 있어도 이성과 모순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종교 때문에 인간의 도리, 곧 인륜을 거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종교의 근본 진리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는 필요 없고, 다만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 종교가 단지 정신 수양을 하는 것이라면 어느 종교를 믿든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윤리 도덕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영원한 삶을 향한 희망을 갖게 합니다.
종교적 삶
종교의 좋은 점은 인정하지만 실제로 종교를 갖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실하고 올바르게 하도록 가르치는데, 그 가르침대로 살면 경쟁 사회에서 밀려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불의한 사회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생존을 위한 전쟁터라고 일컬어지는 사회 생활 속에서도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면서 늘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종교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천주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를 가르치고,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면서 겸손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도록 가르칩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면 살 수 있게 됩니다.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진리와 도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은 존중할 만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웃 사랑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모든 종교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어떻게 믿고, 왜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이 비록 과학 시대라고는 하지만 경제 불황과 사회적 불안이 계속될 때면 인간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악의 유혹과 미신 행위, 그리고 사회 병리적 현상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인지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 정신적 불안정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올바른 삶에 대한 가치 기준도 흐려져서 물질, 명예, 쾌락 등에 집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운명론이나 집단적인 광신 행위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
올바른 삶의 기준
우리는 하루 동안에 수없이 많은 판단을 하고 선택을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느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등등 알게 모르게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판단에는 기준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기준에 따라 판단하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되면 신앙이 삶의 기준이 되고, 아울러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올바른 삶을 위하여 꼭 필요한 기준입니다. 이제 천주교는 우리에게 참된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 줄 것입니다.
신앙과 불신앙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이 권유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자기의 삶을 의지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나 권력을 최고의 의지처로 생각합니다. 또한 “돈이면 다 된다, 돈이 최고야!” 하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바로 믿음의 대상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사정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점쟁이가 차라리 더 믿을 만하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국 인간적인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되고, 터무니없는 미신 행위와 잘못된 운명론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 삶과 죽음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겠다는, 참으로 신앙인답게 살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사랑을 훨씬 뛰어넘는 평화와 기쁨, 참된 행복을 주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미신 행위의 거부
첫째,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기로 다짐한 우리는 돈이나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미신 행위를 하는 것을 바로 중단해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하여 자신이 없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점술과 운명론에 의존하면서 팔자 타령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이 하는 그럴듯한 말에, 또 통계학적이라고 하면서 과학을 가장하는 말에,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확신에서 얻어진 결론들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개척 정신을 무시하는 점술이나 운명론 등 온갖 종류의 미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의 거부
둘째, 천주교 신자들은 시한부 종말론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시한을 정하여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곧 세상의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만나서 기쁨을 누리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죄악의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 날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오직 하느님만 아십니다.
전생과 윤회 사상의 거부
셋째, 하느님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들은 전생이나 윤회도 믿지 않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일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도록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은 환생을 통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기 위한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 결정적인 만남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을 알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자세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잣대로 삼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새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고 진리이신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제부터는 우리 삶의 참된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차별 없이 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 삶의 모습과 방법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그분을 믿을 것이고, 그분을 믿는다면 몸과 마음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절대시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따라 살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위배되는 악의 유혹, 미신적인 모든 행위, 운명론이나 점술을 따르는 사고 방식과 행동을 과감히 끊어 버립시다. 지금까지 우리 삶의 주인이 재물이거나 권력, 또는 인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도록 합시다.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은 죽어져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시비마소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영원무궁 영광일세 영원무궁 영광일세
(천주공경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1-5).
천주교의 유래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로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인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법통을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기 30년 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도들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으로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천주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300여 년 가까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마침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곧이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서구 문화와 문명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가 되어 왔으며, 학문과 예술에도 지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또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애 증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는 약 10억 명(2001년 말 통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같은 믿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
천주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때는 지금부터 200여 년 전입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프랑스 사람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본격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승훈은 귀국하자마자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드디어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외국인 선교사가 천주교를 우리 나라에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한 일입니다.
천주교의 새로운 가르침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 우리 나라는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습니다. 유교 사상과 그 실천은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의 바탕이었습니다. 따라서 유교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학파 학자들은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적과 함께 접하게 된 새로운 종교, 곧 천주교의 가르침에 빠져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행적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사랑과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사회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온갖 박해를 딛고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의 지배층은 천주교 신자들을 동양 윤리의 이단자이며,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하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교사 영입과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힘쓰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1845년 김대건(안드레아)이 중국 상하이 진자샹(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는 귀국하여 일 년도 채 안 된 이듬해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우리 민족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혹독한 박해를 견디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배교(背敎)하겠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단란했던 가정, 잃었던 명예와 가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던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이미 103명은 전세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공경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이런 모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복음 선교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활동, 사회 정의 수호와 인권 옹호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드러내고, 그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은 420만 명(2001년 말 통계)이라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하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북한 형제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하게 민족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신앙을 고백하고 보존하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신앙 유산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 성인들에 관한 책들을 읽고 우리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노력합시다. 또한 가족과 이웃에게도 천주교에 대하여 소개하고, 함께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도록 권유합시다.
천주교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친밀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교회’는 장소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매우 인격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모이려면 일정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2-47).
성당은 하느님의 집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고, 신자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기도와 수련의 집으로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입니다. 성당에 들어갈 때 신자들은 손에 성수(聖水)를 찍어 성호경을 바치면서, 생각과 행동이 오직 하느님께 향할 수 있도록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성당의 중심은 천주교의 공적 예배인 미사가 봉헌되는 제대(祭臺)입니다. 제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제대 앞에서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성당 안에 빨간 등이 켜져 있는 감실(龕室)은 신자들이 미사 때에 받아 모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 곧 성체를 모셔 놓은 곳입니다.
전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
미사를 비롯하여 천주교의 공식적인 경신례(敬神禮)를 전례(典禮)라고 합니다. 전례는 교회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공적 예배를 뜻합니다. 전례를 통하여 신자들은 하느님을 공적으로 흠숭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거룩하게 됩니다. 또한 신자들은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천주교의 대표적 전례인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바치신 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한 형제를 이루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신자들은 주일(일요일)마다, 그리고 교회가 정한 특별한 날에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당에서는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시간을 정하여 여러 차례 미사를 드리는데, 신자들은 편리한 시간을 택하여 미사에 참석하게 됩니다. 미사에서 신자들은 주님께 최고의 경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면서 주님을 대하기 위하여 일어서고, 편안하게 주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앉는데, 이는 우리의 생활 관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구와 본당
교회 역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도(道) 단위 지방 자치 단체와도 같은 커다란 지역을 일컬어 교구(敎區)라고 부르는데, 이는 교황이 임명한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신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의 행정 구역을 말합니다. 교구는 좀 더 작은 신자 공동체인 본당(本堂)으로 나뉘는데, 주교들의 협조자인 신부들이 상주하며 신자들을 보살핍니다. 본당에서는 신자들의 효과적인 신앙 생활을 돕기 위하여 가까운 이웃의 몇몇 가구가 모여 구성하는 작은 공동체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구와 본당에 소속되어 신앙 생활을 합니다. 본당을 중심으로 신자들은, 앞에서 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처럼, 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형제적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며 세상에 나아가 선교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본당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 터전입니다. 본당에는 신자들의 신앙 생활 지도를 책임지고 있는 주임 신부가 상주하고 있으며, 전교 수녀와 사무실 직원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예비신자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예비신자’라고 부릅니다. 예비신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존 신자들과 하나가 될 형제 자매들입니다. 예비신자들은 신자들이 누리는 영적 혜택들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공식 경신례인 미사에는 물론, 여러 가지 기도 모임과 소공동체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비신자의 장례 역시 세례 받은 신자와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한편 예비신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기는 신앙 문제에 대하여 상담할 수 있으며,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신부나 수녀에게 기도를 청할 수 있습니다.
형제애로 보살펴 주는 교회 공동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정 안에서 부모의 사랑과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신자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거룩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본당과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모여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면서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형제애는 굳건한 신앙 생활과 친교의 바탕이 됩니다. 예비신자들도 이러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는 교회 공동체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형제들이 모인 신앙 가족입니다. 그리고 교구와 본당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 터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신자들이 교구와 본당에서 형제애로써 친교를 맺고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비신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교리반에 참여하는 것도 이미 이 친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니, 서로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격려하여야 합니다.
예비신자 때부터 날마다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고, 주일 미사에 성실하게 참여하면서 미사때마다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마음에 새깁시다. 또한 신앙 생활과 관련된 어려움이 있다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신부나 수녀에게 상담을 청하거나 주위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해결하도록 노력합시다.
천주교는 ‘성서’(聖書), 또는 ‘성경’(聖經)이라고 하는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인간은 어디에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등 인간이 제기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의미심장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려 줍니다. 우리는 천주교 신앙을 갖기 전부터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을 통하여 창조 이야기나 모세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 등 성서의 일부 내용과 이미 친숙해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2디모 3,15-17).
계시의 두 원천
천주교는 성서와 성전(聖傳)을 똑같이 하느님 계시의 원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성전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서와 성전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공통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하느님의 똑같은 샘에서 흘러나와 하나를 이루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만으로는 교회가 모든 계시에 대한 확실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똑같은 열성과 경외심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 서
성서는 문자 그대로 ‘거룩한 책’, 곧 ‘하느님께서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책’(계시의 책)으로서 ‘인간에 대한 구원과 사랑의 약속을 담은 책’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내용은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의 상호 관계,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가르침 등을 담고 있습니다. 성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한데 모아 놓은 ‘전집’(全集)이라고 할 수 있으며 크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나뉩니다. 성서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까지 천 년 이상에 걸쳐 쓰여졌습니다.
성서는 비록 인간의 손으로 쓰여진 책이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움직이시어 당신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쓰게 하신 거룩한 책입니다. 성서의 저자들이 썼다 할지라도 성서의 원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서 저자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문학적 형식을 이용하여 인간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성서
구약성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이루셨던 인간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한 민족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이집트 탈출, 곧 민족 해방을 하느님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 가운데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위 26,12)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만을 믿고 따라야 할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계약을 옛 계약, 곧 구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의 내용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법률, 종교, 관습, 문화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인류 가운데에서 실현하시려는 계획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면서 장차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궁극적인 인간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모두 46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에 따라서 모세 오경, 역사서, 지혜 문학서, 예언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계시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계약을 확대하여 모든 민족을 상대로 ‘새 계약’을 맺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드님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신약)을 맺으셨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그분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입에서 입으로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격 증인들이 사라져 가고,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팔레스티나 땅을 벗어나 세계 각지로 퍼지게 되자 그분께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하여야 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렇게 해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내용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루가 복음,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께서 곧 하느님이시다.” 하는 신앙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모두 27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네 복음서 외에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사도들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보낸 신앙에 관한 편지들, 그리고 묵시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전승[聖傳]
성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요한 21,25)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된 것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것을 ‘거룩한 전승’[聖傳]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전과 성서를 하느님 말씀의 단일한 위탁물로 보고 똑같이 소중하게 여깁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성서)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성전)에 대한 유권 해석은 교회의 공식적인 권위(교도권)에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서와 교회의 교도권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대해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자로 기록된 성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스러운 뜻과 인생의 의미, 우리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서보다 더 소중하고 빛나는 교리서는 없습니다. 성서를 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으며, 신앙 생활에서 얻어지는 참되고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성서를 가까이 두고 자주 읽으면서 삶의 지표로 삼도록 합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이 인간 역사에 확연하게 드러난 감격스런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이름에 그치지 않고 “그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신앙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27-29).
역사상의 예수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지금부터 약 이천 년 전, 팔레스티나에 사셨던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구세주,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지만 죄만 빼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참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다 베들레헴의 한 외양간에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모시고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일생의 많은 기간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일상적인 육체 노동을 하며 생활하셨고,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는 유다인의 종교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지만 죄를 용서받는 길을 찾는 모든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따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시고 유혹을 물리치신 다음, 갈릴래아 지방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구세주(메시아)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께서 하느님의 인간 구원 사업을 완성하실 것임을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단순히 설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슬픔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온갖 유혹과 욕망에 묶인 이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된 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도 인간 구원의 절대 조건인 참된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당신께서 바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백성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세관장,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유다인들이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의 여인,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들까지도 아무런 차별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비난하는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31-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과 반대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늘어 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열두 사람을 제자로 삼아 당신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가르침을 듣고 놀라운 행적을 직접 지켜 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구세주로 인정하고 고백하였지만, 처음부터 확고한 믿음을 갖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문이나 한 민족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 구원은 단순한 현세적 만족이 아니라 인간을 모든 악의 뿌리인 죄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와 행복,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현실적 기대를 채워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율법 해석과 성전 운영을 정면으로 논박하셨고, 그들의 위선과 부패를 질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교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하느님 행세를 함으로써 가장 큰 죄악인 하느님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구실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하였으며, 사형의 권한을 가지고 있던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여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고, 해골산(골고타)이라는 언덕에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을 당하시자 제자들은 실망하여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예수 잔당으로 몰려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며 골방에 숨어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용감히 나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돌아가시고 묻히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몸을 만져 보았고, 대화도 나누었으며, 음식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것처럼 여전히 자신들을 가르치시고,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증언하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주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께서 곧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고 권위 있는 가르침과 놀라운 행적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에게 시기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며,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세상의 악과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이고, 장차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부활하리라는 커다란 희망을 갖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대답과 함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들도록 합시다. 또한 가까운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용기 있게 전합시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그네의 삶이 비록 힘겹고 고달프지만 우리의 생각과 자세를 조금만 바꾼다면 좀더 기쁘고 즐거운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길이는 우리가 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넓이와 깊이는 우리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얼굴의 생김새는 쉽게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표정은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늘의 날씨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참된 스승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는 구약에 약속된 바와 같이 ‘주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러 오시어 온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시고 만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는 것’(시편 97,9 참조)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착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 생활에서부터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사람들이 삶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셨습니다.
참 행복
앞에서 읽어 본 ‘참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구조적 불의와 제도적 차별 때문에 참 행복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하느님 나라의 정의가 실현되기 시작함으로써 그들도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살아감으로써 손해를 보거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로 인정받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이는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사람을 해방시켜 주신 다음,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하여 구원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던 소경이나 나병 환자, 세리와 사마리아 사람 등을 가까이 부르시고 치유하여 주시며 함께 대화를 나누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운 모습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뿐 아니라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과 비뚤어진 질서를 바로잡는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고 눈앞의 성공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마태 7,13-14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이 약속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의 새 계명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구약성서의 율법을 폐기하고 새로 만든 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율법은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지만,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근본 정신, 곧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의 원인인 미움과 원한까지도 품어서는 안 되며, 보복의 악순환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마태 7,12)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 나라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심판의 잣대는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소명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는 내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실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들 가운데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자라면 새들이 둥지를 틀 만큼 큰 나무가 되고, 적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리듯이, 하느님 나라 역시 지금은 미약하게 보이지만 이윽고 세상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3,31-33 참조).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셨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13-16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악에 물들어 썩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어둠을 밝혀 주는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줄 때,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을 참으로 알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심으로써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일에 협력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구절을 찾아보고, 그 말씀을 우리 일상 생활의 지표로 삼아 기쁘고 복된 삶을 누리도록 노력합시다.
예비기간
예비신자로 받아들이는 예식을 통하여 예비신자 명부에 정식으로 수록된 예비신자들은 이 예비 기간에 적절한 교리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곧 사고와 행동에서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되어야 하며, 적절한 전례 예식에 참여하고 복음을 선포하면서 교회 건설에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비신자들은 창조론, 구원론, 구세사, 삼위일체론, 교회론, 마리아론, 성사론 그리고 기도에 대한 핵심 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구경꾼이나 손님이 아닌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체 의식을 가지고 교리 공부를 하고, 전례에 참여하며, 준성사를 받으면서 영성 생활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예비신자들은 결코 이론적 공부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기도와 생활로써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가치관의 변화를 통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선교에도 참여하여야 합니다.
“눈부신 태양이 동녘에서 떠오른다.” 하고 흔히들 말합니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 말을 엉터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시적 표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 창조를 마치 곁에서 지켜 본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서 창세기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거나 과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1,1―2,3).
유일하시고 전능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
우리는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시며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유일하신 분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
또한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므로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에서 전능을 떨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고, 그분께서 만드신 것은 그분의 처분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보여 주십니다.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관하여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태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태초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과 하느님의 관계가 온 인류와 하느님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조상 대대로 전해 오던 태초의 이야기는 단순히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화나 전설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해답을 주는 진리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는 천지 창조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기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한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려는 기록입니다. 창세기에는 이 두 가지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위와 같은 신앙의 진리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과 인간을 지어내신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만물의 질서를 세우셨고(지혜 11,20 참조), 그 질서를 바탕으로 온갖 천체와 동식물을 제자리에 채우심으로써 조화를 이루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인 인간이 장차 살아갈 삶의 터전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 가운데 인간만이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이며, 세상의 관리자로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았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고, 당신 사랑으로 만드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된다.’는 하느님 사랑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인간의 행복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설화적인 서술 방법을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창세 2,7)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창조에 쓰인 재료나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원은 하느님께 있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거룩한 숨결로 생명을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인간 생명의 주권은 하느님께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는 하느님과 사람의 친근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곳에서 “동산을 돌보며”(창세 2,15) 사는데, 그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남자와 완전히 동등한 존재로서 삶의 동반자가 될 여자를 만드시고 서로 짝을 이루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생명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 때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인간
에덴 동산의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열매는 다 따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창세 2,17)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금지 명령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자유 영역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헛된 욕망과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고 무질서와 혼란, 온갖 불행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이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단절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름으로써, 하느님께 받았던 복을 저주로 만들어 버린 근원적인 잘못을 우리는 ‘원죄’(原罪)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처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올바른 인간의 길을 알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력,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의지력, 그리고 당신의 뜻을 따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까지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어떤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떤 길이 멸망의 길인지를 제시해 주셨고, 그 결과까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궁극적인 선택은 인간에게 달려 있고,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한 인간은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심판을 자초하여 생명과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던 시절의 기쁨과 평화 대신에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삶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범죄 이야기는 우리에게 암담한 좌절감을 안겨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뱀과 여자가 원수 사이가 되고 서로 투쟁하게 되겠지만, 결국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리라.”(창세 3,15 참조) 하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구원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원죄에 대비되는 ‘원복음’(原福音)이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과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19-20) 하고 말하였습니다.
세상과 인간 구원의 역사
하느님께서는 친히 약속하신 대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그와 그 후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모세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의 율법을 내리셨습니다(출애 19―20장 참조). 그리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이루실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자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시어 인류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히브 1,1-2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시어 인간을 죄악에서 건져내시고(마르 10,45)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신 당신 사랑의 역사입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시며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만물은 모두 선하며,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은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헛된 욕망과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곁을 떠남으로써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심으로써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요한 15,16). 이 부름에 응답하는 길은 사랑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며, 삶의 터전을 이루어 주는 자연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그네의 삶이 비록 힘겹고 고달프지만 우리의 생각과 자세를 조금만 바꾼다면 좀더 기쁘고 즐거운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길이는 우리가 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넓이와 깊이는 우리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얼굴의 생김새는 쉽게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표정은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늘의 날씨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참된 스승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는 구약에 약속된 바와 같이 ‘주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러 오시어 온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시고 만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는 것’(시편 97,9 참조)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착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 생활에서부터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사람들이 삶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셨습니다.
참 행복
앞에서 읽어 본 ‘참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구조적 불의와 제도적 차별 때문에 참 행복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하느님 나라의 정의가 실현되기 시작함으로써 그들도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살아감으로써 손해를 보거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로 인정받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이는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사람을 해방시켜 주신 다음,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하여 구원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던 소경이나 나병 환자, 세리와 사마리아 사람 등을 가까이 부르시고 치유하여 주시며 함께 대화를 나누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운 모습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뿐 아니라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과 비뚤어진 질서를 바로잡는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고 눈앞의 성공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마태 7,13-14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이 약속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의 새 계명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구약성서의 율법을 폐기하고 새로 만든 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율법은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지만,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근본 정신, 곧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의 원인인 미움과 원한까지도 품어서는 안 되며, 보복의 악순환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마태 7,12)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 나라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심판의 잣대는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소명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는 내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실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들 가운데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자라면 새들이 둥지를 틀 만큼 큰 나무가 되고, 적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리듯이, 하느님 나라 역시 지금은 미약하게 보이지만 이윽고 세상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3,31-33 참조).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셨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13-16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악에 물들어 썩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어둠을 밝혀 주는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줄 때,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을 참으로 알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심으로써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일에 협력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구절을 찾아보고, 그 말씀을 우리 일상 생활의 지표로 삼아 기쁘고 복된 삶을 누리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평소에 느끼지 못하였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마음을 환히 밝히며 충만한 기쁨을 주는 어떤 힘으로? 어느 날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여 준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길을 어떤 형태로든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손길은 신비스러운 것이기에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1고린 2,11). 하느님을 계시하여 주시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부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시고 신앙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여 주시는 성령의 활동으로만 성령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때부터 성자와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펼쳐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활동하셨지만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으셨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인간 사회와 자연계에서 하느님의 현존, 곧 하느님의 영을 숨·얼·바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시편 32,6; 에제 37,5).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숨이 없으면 모든 것은 말라 버린 뼈처럼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숨이 불어넣어지면 생기 있고 활기차며 역동적인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고(마태 1,20; 루가 1,35),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셨으며(마태 3,17; 마르 1,10),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마태 4,1; 마르 1,12; 루가 4,1).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심으로써, 당신과 성령의 관계를 명확하게 선언하셨습니다(루가 4,16-21 참조).
예수님께서는 악령에 묶인 사람을 고쳐 주시기 위하여 그 악령을 쫓아 내신 일이 있는데, 그 때도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영, 곧 성령과 함께하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의 권능을 당신께서 행사하고 계심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성령 강림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신도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그 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땅 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체험하였던 것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아라.’ 하고 욕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1고린 12,3).
성령의 은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온갖 유혹에 저항하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욕, 명예욕, 권력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이 모든 자유는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회복시켜 주시고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심어 주시어 참 삶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직책, 분별의 능력,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을 받습니다(1고린 12,4-10 참조). 성부와 성자에게서 파견되어 오신 성령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더불어, 또한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도록 은총의 선물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활력을 주시어 우리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참된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해 보일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은 항상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데 적극적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충만히 받아 변화된 삶을 살아갑시다.
만유 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그 법칙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법칙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위대한 성인들은 하느님과 그분께서 알려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 믿음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의 경험, 곧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전부라는 사고 방식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에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무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믿음을 가능하게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12-15).
삼위일체 신비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 분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계시된 삼위일체 신비는 초기 교회 때부터 신앙의 근원이었습니다. 곧 교회는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왔고 설교나 교리교육, 교회의 기도 안에 삼위일체 신앙을 담아 왔습니다. 교회가 삼위일체 신비를 교리로 확정한 것은 삼위일체 신앙을 왜곡하려는 교회 안팎의 도전에서 이 신앙을 지키고 이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실체’, ‘위격’ 등 다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삼위일체 신비를 교리로 확정하였습니다. 교회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 분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오직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실체이시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
구원 역사에서 드러난 삼위일체
영원하신 성삼위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추상적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는 모든 행위로 보여 주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자께서는 성부께 파견되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밝혀 주셨으며,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깨닫게 하여 주시고, 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한 분 하느님 성부에게서 만물이 비롯되었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며, 한 분 성령 안에 만물이 존재한다.” 하고 고백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삼위께서는 인간 구원 역사에 개별적으로 활동하셨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전체는 삼위의 공동 활동입니다.
구원 역사는 삼위의 공동 사업
구원 계획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업적은 성부와 성령의 공동 사명이며, 성자와 성령의 사명 전체는 성부께서 때가 찼을 때 이루시려고 창조 이전부터 사랑하시는 당신 성자 안에 미리 세워 놓으신 자비로운 “계획”(에페 1,9)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세 위격의 공동 사업이며 동일한 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피조물의 세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며, 각 위격은 자신의 개별적 특성에 따라 공동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 전체를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사명이면서 동시에 개별 사업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다시 설명한다면,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성부께서 그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며(요한 6,44), 성령께서 그를 움직여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로마 8,14).
성서가 전해 주는 삼위일체
신·구약 성서 전체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이 직접 언급되는 적은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강조되고 있는 구약성서에도 하느님께 구별되는 위격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복수 대명사로 표현한 경우(창세 1,26)가 있고, 말씀, 영, 지혜라는 말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는 점 등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신약성서에서 실제로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될 때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루가 1,35) 하고 삼위의 신비가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루가 3,22)고 삼위께서 동시에 현존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실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하심으로써 세 위격을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이 임박하였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요한 14장; 15,26-27; 16,5-15)과 제자들을 위하여 바치신 기도(요한 17장)에서 예수님과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삼위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친교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시고 한 본체를 이루시는 삼위께서는 긴밀한 사랑의 친교를 이루시며 사람들을 그 사랑의 친교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 하시며 우리를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가 알아듣기 힘들지라도 기도에 정진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익혀 가면, 우리도 영원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드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커져 갈 것이고 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느님께서 서로 구분되시면서 완전히 동등하신 삼위이시며 친밀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말합니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반드시 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일치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우리도 서로 친교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칠 때에도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길 역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이르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을 우리는 삼위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일치에 참여하도록 기도와 사랑을 익힙시다.
인간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정과 학교, 사회와 국가 안에서 서로 유대를 가지고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공동체 생활로써 품위와 인격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에 맞추어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을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을 한 백성으로 모아서 당신을 알며 충실히 섬기도록 하셨습니다”(교회 헌장, 9항). 만약 교회 공동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하느님을 올바로 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
교회의 창립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하시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열두 명을 선택하시어 사도로 삼으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내가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하고 말씀하시며 교회 창립을 예고하셨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베드로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6)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고 세상에 나아가 자신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당당하게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날은 교회의 창립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형제적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고,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사도 2,44-47 참조).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불러모으신 공동체, 곧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흩어져 있는 당신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하여”(요한 11,52) 먼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계약을 맺으셨으며,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시어 계약을 맺으셨고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출애 19,5) 하시면서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1-33) 하심으로써 장차 온 세계의 모든 민족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의 피로써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1고린 1,2) 하고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몸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졌듯이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 15,5 참조)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일치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몸의 지체이므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성전
교회는 온 대륙에 흩어져 있기에 풍부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기”(1고린 12,13) 때문에 항상 같은 신앙 고백을 하고, 같은 예배와 성사를 집전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이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과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평화의 끈으로 일치를 이루고(에페4,3 참조)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온전히 교회의 머리에 들어 계시며, 온전히 그 몸에 들어 계시고, 또 온전히 각 지체들에 들어 계시어 교회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고린 6,16)으로 만드십니다.
교회의 특성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는 네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의 세례로 태어나고, 하나의 몸을 이루며, 한 분이신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는 거룩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바치셨으며, 거룩하신 성령께서 교회에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는 보편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현존하시므로 교회는 그분의 진리를 온전히 지니고 있고, 이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도들 위에 세워졌으며,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보존하고 이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계 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교회 안에 다양한 직무를 마련하셨고, 당신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에게 고유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의 신분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과 권한으로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맡기신 성직자와, 교회와 세상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사명을 수행하는 평신도가 있습니다.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 가운데 복음의 권고(청빈, 정결, 순명)를 서원함으로써 하느님께 봉헌되어 교회의 구원 사명에 이바지하는 이들입니다. 성직자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 주교의 협조자인 신부와 부제입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비로소 완전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켜야 할 사명을 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순례자들이므로 그들로 구성된 이 지상의 교회는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지체들의 허물과 인간적인 나약함도 함께 껴안고 있으며, 인류 역사의 기복에 따라 때로는 영광의, 때로는 시련의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함으로써 정화되고 쇄신되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희생, 특히 미사 성제로 서로 일치하고 도와 줍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우리는 천국의 성인들과 일치하고 그들을 기억하고, 축일을 지내고 그들의 모범을 따릅니다. 천국에 있는 성인들도 우리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와 천국의 성인들은 천국에 들지 못한 죽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곧 지상에서 순례자로 있는 사람들, 정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죽은 이들, 천국에 있는 성인들이 모두 일치하여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성전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께 부여받은 고유한 직무를 수행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므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기쁨과 즐거움은 물론 슬픔과 고통도 함께 나누어야 하는 형제들임을 항상 기억합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지닌 좋은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눌 때 기뻐합니다. 좋은 물건, 희망이 넘치는 기쁜 소식, 뛰어난 사상이나 아름다운 감정 등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하느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성전인 교회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해 보임으로써, 온 인류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인도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예언자직). 또한 기도와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길을 보여 주셨으며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가장 완전한 제사를 봉헌하셨습니다(사제직). 그리고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게 봉사하셨습니다(왕직 또는 봉사직).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러한 사명에 제자들도 동참하도록 분부하셨고, 직접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마태 10,5-14; 루가 10,1-11 참조). 이와 같이 선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기에 교회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면서 모든 신자를 삶의 현장으로 파견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목적은 단순하게 세례를 베풀어 신자 수를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에 참여하게 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어느 모임도 따를 수 없는 형제적 사랑과 나눔으로 일치를 이루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에게 선교 활동의 좋은 귀감이 됩니다. “신도들은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6-47).
예언자직
교회의 선교 사명은 세상에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9,16) 하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2)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는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뿌리박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가정에서 화목을 이루고 직장에서 성실하며 이웃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바르게 행동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면서 늘 기쁘고 희망찬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신앙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면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제직
교회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선교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같은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죄를 용서받게 하여 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함으로 인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들은 사제적 백성이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구원을 위하여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처럼, 날마다 수고하고 열성적으로 노력하여 자기 삶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왕직 또는 봉사직
교회의 선교 사명은 또한 세상에 봉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의 왕국은 이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참 행복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마르 10,45)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 특히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자매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선교 활동은 일종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잔칫상을 차려 놓았더라도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올 수는 없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세태에서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도와 주며 아무런 사심 없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을 본다면, 세상 사람들도 마음을 열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증언하는 선교 활동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과 사제직과 왕직(봉사직)을 올바로 수행함으로써 모든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성실히 협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들, 형제와 친구들, 직장 동료와 가까운 이웃 가운데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먼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니시던 이스라엘 산천을 성지로 정하여 순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사도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 모든 성인을 공경합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께서 사시던 곳이기에 성지라 불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전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기에 성인으로 공경받는다면, 예수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얼마나 더 거룩한 분으로 존경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가 1,28-38).
천주의 성모,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 마리아의 참 아드님이 되신 분은 다름 아닌 성부의 영원하신 아드님 성자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를 참으로 천주의 성모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로마 12,5)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낳은 어머니는 그리스도와 결합된 우리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요한 19,26-27)하셨습니다. 그 날부터 사도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하였고, 그 제자들은 물론 초대 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당부에 따라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교회의 모범이신 마리아
성모 마리아께서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하느님이시니,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명의 정신으로 성령에 의한 동정 잉태를 받아들여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 마리아께서는 구세주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곁에서 당신 아드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실 때 당신도 모든 것을 봉헌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와 교회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올 어머니로 받들며, 그분께 자녀다운 효성을 바치는 것입니다(교회 헌장, 53항 참조).
마리아와 성인 공경
우리는 성인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빌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성인들을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도 그분들처럼 굳은 신앙 속에서 하느님을 언제나 사랑하며 받들도록 도와 주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 줄 것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구’(轉求)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신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성모 마리아께 공경을 드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바쳐 왔습니다. 우리의 마리아 공경은, 물론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연히 고귀한 품위를 지니시지만 역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마리아 공경은 과장도 부족도 없는 가장 합당한 공경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마리아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 그 위대한 임무에 합당한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라고 인사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돌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드시지 않게 보호되셨다고 믿습니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마리아께서 동정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셨고 나아가 평생 동정이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성화하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모 승천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활을 끝내시고 하늘에 계신 아드님께 돌아가셨습니다. 몸과 영혼을 그대로 가지시고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이 교리는 성모 마리아의 거룩한 덕행과 품위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과 인간의 목적, 죄, 죽음, 육신의 부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죄에 물든 일이 없는 몸이셨기에, 당신 아드님처럼 그분의 몸도 무덤에 계시면서 죄가 세상에 가져온 죽음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낳아 주신 분께서 육체를 가지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부활한 영광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한 성모 승천은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교회는 2000년 동안 성모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시라고 공경하여 왔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께서 신앙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순명에서, 하느님께 향하는 사랑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봉헌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 받으신 영광은 장차 우리도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므로 그분께서는 우리 희망의 표지이십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굳은 신앙을 가지고 겸손과 순명의 자세로 살아갈 것을 결심합시다. 그리고 ‘묵주기도’를 배워 열심히 기도합시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생각이나 마음가짐을 밖으로 드러내고자 여러 가지 상징들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혼인 반지는 단순한 금붙이가 아니라 신랑 신부가 서로 사랑과 헌신을 서약한다는 상징이며, 국기도 마찬가지로 단지 천조각이 아니라 국가와 애국심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이 밖에도 문자, 언어, 그림, 예의 범절, 행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활에서 수많은 상징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도 많은 상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은총의 선물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1고린 2,12-14).
성사란?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의 효과적인 표징들로서, 이 표징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천주교는 우리에게 신앙을 심어 주고 신앙의 성숙을 돕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기 위하여 우리 생활과 밀접한 표현과 사물들로 구성된 여러 가지 특별한 표징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오심을 체험하게 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곧 성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눈에 보이는 표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성사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 인간의 양심,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지만, 인간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쉽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인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성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감각적으로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현실 세계의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은총을 체험하는 데에 감각적인 표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어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하시며,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볼 수 있는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이고,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성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칠성사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일곱 가지 성사를 제정하셨는데 이는 신앙 생활의 중요한 단계나 시기에 관계됩니다. 이 일곱 가지 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인 세례성사·견진성사·성체성사, 치유의 성사인 고해성사·병자성사, 그리고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인 성품성사·혼인성사입니다. 이 가운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성품성사는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으며, 나머지 성사는 시기와 기회에 따라 여러 번 받을 수 있습니다.
성사를 통하여 받는 하느님의 은총
우리가 성사를 통하여 받는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자비와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생명의 은총’(상존 은총)으로서 늘 우리 안에 머물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부모에게 생명을 받고 태어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도움의 은총’(조력 은총)으로서 우리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은총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내적으로 비추고 움직여 줌으로써 그때 그때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우리를 돕는 은총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제정하셨고 실질적으로 주관하시므로, 교회 안에서 합당한 절차로 거행되었다면 성사 예식을 집전하는 사제의 개인적인 성덕과 관계 없이 성사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은총이 베풀어집니다. 한편, 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지향, 마음가짐과 열정에 따라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성실한 참여가 필요합니다.
준성사
교회는 몇 가지 봉사 직무와 생활 양식, 신앙 생활의 여러 상황, 사람들에게 유익한 물건 등을 성화하고자 준성사를 제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려고 교회가 오랜 관습과 거룩한 전통에 근거하여 성사들을 어느 정도 모방하여 설정한 상징이나 예절을 ‘준성사’(準聖事)라고 합니다. 준성사에는 축복, 봉헌, 구마 등이 있습니다.
성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 안에 일곱 가지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받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변화된 삶,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세례성사는 물론, 앞으로 교회에서 받을 다른 성사도 열심히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심합시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단체에 가입하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그 단체의 목적과 활동에 동의하며 회원의 권리와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입단식 또는 입회식을 거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천주교에 입문하는 절차도 겉보기에는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입문은 우리의 삶과 영원한 생명에 직결되는 유일한 선택이고, 신앙적 결단이며, 입문과 동시에 신분상의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므로 일반 단체의 가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그 때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마르 1,4-11).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인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기초를 놓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들은 견진성사로 굳건하게 되며 성체성사로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받습니다.
세례성사의 의미와 효과
우리가 정해진 준비 과정을 마치고 천주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될 때 받는 예식이 ‘세례성사’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베푸는 다른 성사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洗禮)는 본래 물에 잠기었다가 나오는 예식이었지만 점차 물로 이마를 씻는 예식으로 간소화되었습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 새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물에 잠기는 예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로 씻는 것은 몸의 더러움을 닦아 내는 것이지만, 그러한 눈에 보이는 예식 행위로써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상징하고 또 내적으로 그것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물은 생명을 싹트게 하고 성장시키는 한편 일순간에 생명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례성사 예식은 죄악에 물든 과거의 우리 자신은 죽게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새 생명을 얻게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세례성사를 받게 되면 우리가 물려받은 ‘원죄’와, 지금까지 우리가 저지른 죄인 ‘본죄’를 모두 용서받아 깨끗한 몸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게 됩니다.
세례성사는 우리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영적 표시인 인호(印號)를 새겨 주기 때문에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는 우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특정한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고, 대부모를 정하여 신앙 생활에 도움을 받습니다.
세례성사의 집전자
세례성사는 주교와 신부와 부제가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누구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줄 수 있습니다. 이 때에도 교회의 지향과 양식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가 정한 양식은 세례 받을 사람의 이마에 물(자연수)을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 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받기 위한 준비
세례성사는 우리의 완전한 자유 의사에 따라 주어지는 성사이므로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 세례성사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리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넷째, 지금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견진성사의 의미와 효과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성령의 은총을 베푸는 예식이 ‘견진성사’입니다. 견진성사는 주교의 안수(按手)와 기름 바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새 신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의 은총을 완성시키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사도 8,15-17; 19,5-6 참조). 기름 바름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여 줍니다. 견진성사를 받는 사람은 이 기름 바름으로 성령의 인호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전해 주는 상징적 행위이며, 기름 바름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견진성사로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받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전파하고 몸소 실천하며, 교회 공동체에 충실히 봉사하는 일꾼이 됩니다.
성령의 성사인 견진성사
견진성사는 우리에게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성령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손을 얹자 성령을 받게”(사도 8,17)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견진성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세례성사를 완성하는 성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풍부하고 다양한 선물들에 대하여 성서는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로마 8,26-27; 1고린 12장; 2고린 13,13; 골로 1,8 참조).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는 지혜(슬기), 통찰(깨달음), 의견(일깨움), 용기(굳셈), 지식(앎), 공경(받듦), 외경(두려워함)(이사 11,2-3 참조)의 일곱 가지이며,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의 아홉 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견진성사의 집전자
견진성사는 주교가 직접 거행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신부도 줄 수 있습니다. 주교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견진 받는 신자들을 교회와 더욱 결합시키고,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할 사명을 잘 드러내 줍니다.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로서 일반적으로 12세가 넘고 교리교육을 충분히 받아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갖춘 사람이 받게 됩니다. 견진성사를 받는 사람은 세례성사 때의 대부모를 견진성사의 대부모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교회와 결합하여 하느님께 받은 신앙을 세상에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견진성사로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고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옹호하며 전파하는 교회의 충실한 일꾼이 됩니다.
'예비신자'인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책임감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살도록 힘씁시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자식을 위하여 어떠한 희생도 마다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는 자식이 자신의 살과 피를 바쳐 죽어 가는 부모를 살렸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생명을 바쳐 자식이나 이웃의 생명을 구해 낸 이야기가 많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3-29).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합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된 사람들은 성체성사로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합니다.
성체성사의 의미와 효과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받아들이신 십자가 희생 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 성체성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聖體]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음식이 나타내는 효과를 우리 안에 실제로 이루십니다. 곧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모시는 영성체로 주님께 대한 일치가 증대되며, 소죄를 용서받고, 대죄에서 보호받습니다. 또한 영성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도 확고하게 하여 줍니다.
성체성사는 언제나 교회의 공적 예배인 미사 중에 이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가장 큰 은총의 성사이기 때문에, 모든 성사의 중심이고 정점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얻어 신앙 생활에 활력을 얻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제정
성체성사는 이미 구약 시대부터 예고되어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굶주리는 그들에게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현세적 생명을 유지하며 하느님 백성으로 살도록 내려 주신 양식이었지만, 이 만나로써 하느님께서는 장차 당신의 새로운 백성이 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실 성체성사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하실 때 빵을 많게 하셔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요한 6,1-15; 마태 14,13-21 참조)을 행하시면서 성체성사의 의미를 미리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몰려드는 군중을 향하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하셨으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구약의 예고를 완성하고 실현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만찬을 하시면서 손에 빵을 드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루가 22,19) 하시며 당신의 몸을 우리가 먹을 양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것은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몸소 파스카의 어린 양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희생 제물로 바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손에 포도주 잔을 드시고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루가 22,20) 하시며 당신의 피를 우리가 마실 음료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은 당신의 피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어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온 인류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풀어 주셨고,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새 계약을 맺어 주시는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이루는 미사 성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예식이 바로 미사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단순히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계시며, 사제를 통하여 미사를 직접 주재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체성사를 이루는 미사는 예수님께서 몸소 제관이 되시고 몸소 제물이 되시어 봉헌하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이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구원 사업을 기리는 기념 제사입니다.
또한 미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하느님께 바치고 이를 우리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보증하여 주기에, 찬미와 감사의 제사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하느님께 예배 드리고 감사 드리며 속죄하고 기원하는 가장 완전한 제사입니다.
미사 전례
미사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거행됩니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독서, 복음, 강론), 보편 지향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성찬 전례는 예물 봉헌, 축성의 감사기도(빵과 포도주의 축성), 영성체(領聖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핵심이며 정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체성사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성부께 단 한 번 봉헌하신 찬미와 감사의 제사에 교회와 교회의 모든 지체를 참여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고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과 이웃과 확고히 일치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지 않은 우리는 아직 영성체를 할 수 없지만 미사에 성실히 참여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하여 지금부터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합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순간의 실수나 잘못된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안과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전과 같이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때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고 때로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겪는 이러한 일은 신앙 생활 중 하느님과 맺는 관계,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 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루가 15,11-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당신의 치유와 구원 사업을 계속하여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치유의 두 가지 성사, 곧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의 목적입니다.
고해성사의 의미와 효과
우리는 흔히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 법을 어긴 행위를 죄라고 말하는데, 근본적으로 죄는 하느님과 맺는 친교를 잃는 것입니다. 곧 죄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은 채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뜻과 영원한 생명에 두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눈앞의 이익에 두는 데서 비롯되는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짓는 죄는 그 사람에게만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름으로써 하느님, 이웃, 자기 자신과 이루는 관계에 상처를 입히거나 파괴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받는 예식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불완전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가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함으로써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고해성사는 죄 때문에 받을 벌을 면제하여 주고 죄의 유혹과 싸워 이길 힘을 키워 줍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고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은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9) 하셨으며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에게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요한 20,23)이라고 하시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해성사 때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죄의 용서 역시 하느님께서 직접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
고해성사는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와 사제의 사죄로 이루어집니다. 고백자의 행위는 뉘우침(통회), 고백, 보속입니다. 가장 중요한 행위인 뉘우침(통회)은 지은 죄를 하느님의 법에 비추어 철저히 성찰하는 것과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을 더럽히고,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친교에 손상을 입혔으며, 이웃에게 피해를 끼쳤음을 아프게 뉘우치는 것,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받을 때는 사제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는 사제가 정해 주는 보속을 하여야 합니다. 보속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끼친 손해를 갚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생활 태도를 다시 갖추기 위한 것이므로 성실히 이행하여야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빚어지는 작은 죄(소죄)는 양심 성찰과 참회의 기도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거스르는 것과 같은 죽을죄(대죄)를 지었을 때나, 작은 죄일지라도 습관적이며 의식적으로 지었을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죽을죄는 십계명에 나와 있는 중대한 일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고의로 저지른 모든 죄입니다. 만일 고해성사를 받을 때 기억에 떠오르는 중대한 죄들 가운데 어느 것을 고의로 숨기거나 아무런 통회도 하지 않고 고백한다면 고해성사를 모독[冒告解]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대사(大赦)
선한 뜻을 지닌 신자가 기도, 선행 등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대사(大赦)를 얻을 수 있습니다. 대사는 이미 죄는 용서받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받아야 할 일시적인 벌, 곧 잠벌(暫罰)을 면제하여 주는 것인데 어느 신자이든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얻을 수 있고, 또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얻어 줄 수도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의미와 효과
병자성사는 중병이나 노쇠 상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주님께서 바라실 경우 치유의 은혜도 주는 예식입니다. 질병과 노쇠는 우리 몸과 정신을 약하게 하고 고통을 줍니다. 동시에 병자는 일상 생활에서 격리되어 외롭고 쓸쓸한 상태가 되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럴 때 병자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인답게 병고를 이겨 내고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치유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더 큰 희망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병자성사 예식
병자성사는 사제(주교와 신부)가 집전합니다. 병자성사의 주요 예식은, 병자의 이마와 양 손에 성유를 바르고 병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많은 병자들을 직접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고 파견되어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으며”(마르 6,13), 교회의 원로(사제)들에게 이 직무를 계속해서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으려면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고, 병자성사 후 성체를 받아 모시게 됩니다. 이 때 모시는 성체를 노자(路資) 성체라고 하는데,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건너가는 데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병자성사는 병에 걸렸을 경우 몇 번이고 받을 수 있으며, 노환으로 기력이 쇠진해진 노인은 병세의 위험성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은 후에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쳐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함으로써 다시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거나 임종을 앞두었을 때에는 병자성사를 받아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치유의 은혜를 받고,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합시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병고에 시달리거나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도록 노력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많은 갈림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갈림길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느끼면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앞에서 배웠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길을 선택하는 데는 하느님의 뜻이 작용합니다.
성경 읽는 일과 격려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힘쓰시오. 그대가 선물로 받은 그 거룩한 직무 곧 원로들이 그대에게 안수하며 예언해 준 말씀을 통해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를 등한히 하지 마시오. 이 직무에 전념하고 정성을 다하시오. ……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디모 4,13-16).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9,4-6).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하는 성사입니다. 이 성사들을 받는 이들은 그 고유한 사명으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게 됩니다. 성품성사를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백성의 목자로 축성되는 것입니다. 한편 혼인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의 혼인이 견고하게 되고, 신자 부부는 혼인성사 생활을 통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원에 봉사하게 됩니다.
성품성사의 의미와 효과
성품성사는 하느님과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특별히 선발된 사람들을 서품(敍品)하고 그들에게 직무를 수여하는 예식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신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신자들의 보편 사제직)합니다. 이 보편 사제직을 바탕으로,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서품된 사람들은 고유한 직무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직무 사제직)합니다. 성품성사 예식은 주교의 안수와 장엄한 축성 기도로 거행되는데, 이는 서품된 사람들에게 그 직무에 필요한 성령의 은총을 내려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에게는 영적 표시인 인호가 새겨지기 때문에 평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습니다.
직무 사제직
사제들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유일한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셨으며,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여 제사를 바치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완전한 중개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계승되도록 하느님께 제사를 거행하고(사제직), 하느님 백성을 돌보며(왕직),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예언자직) 직무를 사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예수님께 부여받은 이 직무들이 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자신들의 후계자(주교)와 그 협력자(신부), 주교와 신부를 도와 줄 봉사자(부제)를 선발하여 기도와 안수로 직무를 수여했습니다(사도 6,3-6). 이러한 직무는 대대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품성사의 세 품계
직무 사제직은 예로부터 주교, 신부, 부제의 세 품계로 수여되었습니다. 주교는 충만한 성품성사를 받음으로써 주교단에 들게 되고, 그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교구)의 볼 수 있는 으뜸이 됩니다.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위 아래, 사도적 책임과 교회 전체의 사명에 참여합니다.
신부는 사제로서 지니는 품위는 주교와 같지만 사목직 수행에서는 주교들에게 딸려 있습니다. 신부는 주교의 협력자로서 주교를 중심으로 사제단을 형성합니다.
부제는 교회 봉사 임무를 위하여 서품되는 성직자로서 말씀의 봉사와 하느님 예배, 사목적인 지도, 자선 사업의 중요한 임무를 받습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자유로이 독신 생활을 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고, 그 뜻을 공적으로 표명하는 세례 받은 남자에게만 주교가 성품성사를줍니다.
혼인성사의 의미와 효과
세례성사를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혼인은 성사가 됩니다. 따라서 이들의 혼인 생활은 성사 생활입니다. 그러나 두 신자의 혼인이 교회에서 인정하는 유효하고 합법적인 성사가 되려면, 성직자와 2명 이상의 증인들 앞에서 자유로이 혼인 합의를 표명하여야 합니다.
혼인성사 생활을 시작한 부부는 혼인성사를 이루기 전과는 달리 더 이상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성사적 은총을 가진 초자연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이는 서로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는 지극히 은혜로운 사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인성사는 다른 성사와 달리 부부 스스로 성사를 이룹니다. 이미 세례를 받기 전에 혼인한 부부가 세례를 받으면 그들의 혼인 생활도 성사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혼인성사는 일회적으로 집전되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지속적인 성사입니다.
혼인성사에 대한 가르침은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고, 그들에게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고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창세 1,27-28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인 일부일처제(혼인의 단일성)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는 죽음 외에는 결코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가르치셨습니다(마르 10,2-9).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당신을 희생하셨듯이 부부는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서로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에페 5,25-32).
혼인의 목적과 특성
하느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혼인의 목적은 부부가 사랑으로 일치하고, 그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입니다. 혼인의 특성은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입니다. 단일성은 일부일처제가 아닌 어떠한 다른 형태의 혼인도 배격합니다. 그러므로 중혼이나 축첩은 혼인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또한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부부가 서로 존경하며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기에, 유효하고 합법적으로 맺어진 혼인을 깨뜨리는 이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부부의 혼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곧 부부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단일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바치시어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는 자신의 신랑인 그리스도를 끝까지 사랑하고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갈라질 수 없듯이, 혼인의 서약을 한 부부는 죽음이 아니면 갈라질 수 없으므로, 신랑 신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자녀를 낳아 기름으로써 혼인의 서약을 완성하여야 합니다.
혼인에 관한 교회의 규정들
교회는 혼인의 본질적 요소나 특성을 바탕으로, 혼인 당사자들과 새로 꾸며지는 가정을 보호하고자 혼인법을 정하여 놓았습니다. 신자가 교회의 혼인 예식을 따르지 않고 혼인하거나 교회의 허락(관면) 없이 비신자, 또는 타종교인과 혼인을 한다면, 교회법상 혼인 장애(조당)에 놓이게 됩니다. 혼인 장애의 상태에 놓인 이들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지만 성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비신자와 혼인하려는 신자는 혼인한 다음에도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하고, 태어날 자녀에게 천주교 신앙을 교육시키겠다는 서약을 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과 세상에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아 성품성사를 받은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신자 부부는 혼인성사 생활로 부부 사랑과 자녀 출산, 양육에 필요한 은총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와 사랑을 드러내고 이에 참여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자녀들의 혼인이 혼인성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성직자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그들의 직무 수행에 성심껏 협력합시다. 또한 하느님의 부름, 곧 성소(聖召)에 언제나 귀 기울이도록 합시다.
정화와 조명의 시기
이 시기에 예비신자들은 선발 예식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세례 후보자가 됩니다. 교회는 대부모와 교리교사의 증언을 듣고 예비신자 자신의 신앙과 세례를 받으려는 결심은 물론 예비신자의 삶의 변화를 보고 세례 후보자로 선발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 후보자들은 파스카 축제와 입교 성사를 준비하고자 영적, 지적으로 최종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 공동체는 예비신자들에게 신경과 주님의 기도 수여식을 통하여 최종 준비 예식을 베풉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자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지. 그럼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꽤 알겠군. 그분 어떤 분인가? 어디서 태어나셨고 돌아가실 때 나이는 몇이었고 설교는 몇 차례나 하셨나?” “글쎄 잘 모르겠네.”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니?” “자네 말이 맞네. 난 사실 아는 게 너무 적어 부끄럽네. 하지만 3년 전 나는 주정뱅이였고 빚을 지고 있었지.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되어 갔고 저녁마다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무서워했네. 그러나 이제는 술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귀가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릴 정도라네. 우리 집은 이제 화목한 가정이 되었네. 이게 모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걸세. 이만큼은 나도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알고 있네.”
』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1-13).
회개의 삶
세례성사로 성령을 모시고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은 세례와 함께 시작된 회개의 삶을 평생토록 계속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먼저 “회개하여라”(마태 4,17)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흔히 ‘회개의 삶’이라고 합니다. 회개라는 말은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을 가리키며 하느님께 귀의하여 생활 전체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삶은 이 세상의 헛된 우상들을 찾으면서 그 우상이 주는 일시적인 안락을 추구하던 지난날의 삶을 뉘우치고, 이제는 하느님만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며 오직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삶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세례 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이 은총에는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만을 열망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세 가지 덕행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덕, 망덕, 애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회개한 삶, 끊임없이 당신을 향한 신망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얼이신 성령을 통하여 은총과 힘을 거저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신망애의 삶에는 우리의 의지적 노력도 꼭 필요합니다.
믿음의 삶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계시하신) 것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가 우리에게 믿으라고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온전히 자유롭게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믿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2-23)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확고한 믿음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 사람은”(갈라 3,24)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믿음이 때때로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마르 9,24) 하고 겸손한 자세로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 행동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됩니다(야고 2,22-26 참조).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마태 10,32-33).
희망의 삶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에 초대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우리도 세상 끝날에 부활하리라는 확신을 주셨으며, 마침내 세상과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시리라는 참된 희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희망은 참된 믿음에서 자라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히브 10,23-24) 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로마 12,12)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불행과 고통에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 생활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나라에서 참 행복을 누리리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삶
우리는 하느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사랑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범을 따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그 악을 이겨 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삶
예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1요한 4,8),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기”(골로 3,14)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완전한 삶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완성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생활에 사랑이 넘칠 때 우리는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 없이 늘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완전한 삶은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연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실 것이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정신을 더욱 깊게 심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굳은 희망을 갖게 되며, 마침내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게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뿌리로 하고 희망을 줄기와 가지로 한 나무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려고 기다리십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이웃과 함께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고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사람이 혼자서 산다면 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던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법이 필요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법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때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법 없이는 질서를 이룰 수 없고, 질서가 없는 인간 사회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법은 완전하지 않아 때때로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정한 법은 우리의 공동체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계명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다(마태 19,16-21).
그리스도인의 행동 기준인 하느님의 법
우리는 세례성사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고,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 필요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제정해 주신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자연법과 양심
하느님의 법은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스럽게 알아 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여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해야만 할 일 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하는 하느님의 법은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연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부터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양심을 통하여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법(율법)과 십계명
하느님의 법은 자연법으로서만이 아니라 문자로 쓰여진 성서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성서의 계시 말씀에 따른 삶의 규범들, 직접적인 윤리적 가르침 등이 그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한 삶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십계명은 가장 직접적이고 대표적인 종교적, 윤리적 삶의 규범이었습니다(출애 20,1-21 참조).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하느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의 지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인간에게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주는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천하기 쉽게 간단 명료한 행동 규범을 십계명에 담으셨습니다.
다음의 십계명 가운데에서 처음 세 가지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도리를 말하고, 그 다음 일곱 가지 계명은 인간에 대한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첫째 계명은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온갖 종류의 미신 행위, 불경죄, 무신론은 바로 이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둘째 계명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며 맹세하는 것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죄가 됩니다.
셋째 계명은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주일(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합니다. 신자들은 주일에 미사에 참여하고 정신과 육체의 적당한 휴식을 방해하는 일이나 활동을 삼가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주일은 자선 사업과, 불우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데 바쳐져 왔습니다.
넷째 계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낳아 길러 주시는 부모와 웃어른과 정당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공경하라고 명하십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올바른 존경과 감사와 도움을 드려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은 모든 사람의 생명은 임신[受精]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고귀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낙태, 안락사, 자살 행위도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여섯째 계명은 자신의 성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과 성의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정결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명합니다. 자위, 혼전 성행위, 춘화의 제작과 배포, 동성애 등은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일곱째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빼앗거나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을 금합니다. 그리고 재물과 노동의 결실을 관리하는 데에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덟째 계명은 진실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올바르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새사람들이기에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거짓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아홉째 계명은 육체의 탐욕을 경계하라고 명합니다. 육체의 탐욕을 이기려면 마음을 정화하고 절제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야 우리는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열째 계명은 사람의 참된 열망은 이 세상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재산과 그 힘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무절제한 물욕에서 벗어날 것을 명합니다.
신약의 법 = 그리스도의 법(새 법)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지켜야 할 새 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새 법의 정신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나오는 여덟 가지 ‘참 행복’(마태 5,3-12 참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전도시키는 이 규범은, 삶의 참된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참 행복을 얻는 삶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9) 하시며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시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묶어 완성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 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시면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당신의 삶으로써 가르쳐 주셨습니다(요한 13,34 참조).
이 모든 것을 볼 때 세례를 받아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삶의 기준은 문자로 쓰여진 법이라기보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 곧 새 법이란 그리스도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그리스도의 법 =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을 지키라는 의무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은총도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며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타이르시고 고무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은 곧 성령의 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의 인도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실정법과 교회법
하느님의 법을 기초로 하여 제정된 국가법과 국제법 또한 그리스도인이 양심적으로 지켜야 할 행동 기준입니다. 우리 내부에 간직한 하느님의 소리인 양심과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권고에 따라,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문제들에 하느님의 법을 적용하고 생활화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참된 신앙을 증언하여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가 정한 교회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일반 규범과 성사 생활에 관한 규율, 교회의 운영에 관한 규율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삶의 기준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연법, 성서의 규범들, 정당한 실정법, 교회법 등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는 법은 결국 그리스도의 법(새 법),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곧 그분의 영이신 성령의 법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아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로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의 법과 성서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에서 정한 법을 잘 지키고 따르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생명을 지키고 연장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인간 생명이 알게 모르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주님, 저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꺾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통틀어 양 떼와 소들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며
바닷속 지름길을 두루 다니는 것들이오이다.
주님, 저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
존엄한 인간의 생명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숨결’로 생명을 부여받았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품위를 한층 올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광대함과 비교해 볼 때 아주 하찮은 존재임에도 인간이 위대한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이어 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느님의 인간 창조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손상시킬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인간이 하느님께 받아 지니게 된 권리[天賦人權] 가운데 가장 숭고한 권리인 생명을 지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생명 경시 현상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농경 사회를 이루고 대가족 제도를 유지해 오면서 가족간의 긴밀한 유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수태된 생명을 언제나 가장 소중하게 보살폈으며, 출산하여 하나도 잃지 않고 키워 냈을 때 이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큰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산업 사회로 발전하고 핵가족화된 오늘날 우리 가정에는 이러한 미덕이 차츰 사라지고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가 넘실거립니다. 자립과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멀어지고, 순간적 쾌락에 탐닉하는 경향과 남아 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우리의 가정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는 무분별하게 낙태 시술을 하는 등 생명을 해치는 끔찍한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임신[受精]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태아도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바라지 않은 성(性), 또는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는 이유로 인공 유산을 하는 것은 명백한 살인 행위입니다. 또한 가족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불임 수술을 하거나 인공적인 피임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죄스런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함부로 해치는 풍조는 성을 한낱 쾌락의 대상이나 상품으로 여기게 하고 결국 인간 존엄성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족 계획
부부가 원만한 가정 생활이나 건강 문제 또는 부양 능력에 맞추어 자녀 수를 결정하는 것은 책임 있는 행동이므로 교회는 자연적인 가족 계획을 인정합니다. 또한 부부의 성생활은 자녀의 출산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부부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태아, 곧 한 인간 생명체를 마음대로 없애 버리고, 하느님께서 인간 육체에 부여하신 자연 질서까지 거슬러 가며 피임을 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부는 산아 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면 자연적인 가족 계획법(자연 주기법, 점액 관찰법 등)을 활용하여야 합니다. 최근 생명 공학의 발달로 이른바 ‘시험관 아기’나 ‘복제 인간’에 대한 갖가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확고한 윤리 의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면서까지 이루어지는 과학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 사회를 불행하게 하고 자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자연과 환경
인간 생명은 자연 환경과 어우러져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연이 훼손되고 환경이 오염되면 인간의 생명도 위협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오존층의 파괴, 온실 효과, 산성비, 토양 부식, 해양 자원의 고갈, 물과 공기의 오염, 이상 기후 등은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기아와 전쟁, 온갖 종류의 폭력과 반인권적인 사회 제도 역시 생명 문제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핵무기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만큼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가정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존중할 줄 알고, 언제나 인간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을 이루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현재 닥친 생명의 위협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위험과 악의 요소까지도 찾아 내어 극복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여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는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과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가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부모는 가정 안에서 인간 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자녀들에게 가르쳐 자녀들이 생명의 봉사자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임신[受精]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존귀합니다. 인간은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분과 닮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생명을 훼손하지 말고 잘 간수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정과 세상 안에서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낙태, 안락사, 자살, 살인 등 직접적인 생명 파괴 행위는 물론이며 장기 매매나 인간의 몸을 비윤리적인 목적이나 방법으로 실험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창조주의 거룩하신 뜻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단호히 배격하도록 합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가정 생활을 바랍니다. 가정을 떠나서는 안정될 수 없고, 가족간의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불화를 안고 살아가는 가정도 보고, 비록 어려운 형편이지만 늘 웃음꽃을 피우는 가정도 봅니다. 가족 사이에 인격적 친교와 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면 아무리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가정’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에도 차원 높은 가치관과 올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처럼 아내도 모든 일에 자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에페 5,22 ― 6,4).
가정의 목적
가정은 모든 인간 관계와 활동의 기초이며 중심입니다. 가정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한 몸을 이루고, 그 부부 사랑의 결실로 얻은 자녀를 참 그리스도인으로 기르며, 일치와 나눔으로써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은 사랑과 평화, 정의와 질서가 실천되는 장소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그 중심이 되십니다.
부부 사랑의 특성
부부의 화합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기초입니다.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라 할지라도 반복되는 일상사, 자녀 문제, 사업이나 직장 문제, 부모나 친척과의 관계 등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때때로 서로 상대방에게 실망과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부부 사랑은 자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에서 진정한 부부애의 기쁨이 우러나옵니다. 부부가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하여 서로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격의 없는 대화로 서로 보완하고 채워 준다면 일치와 화합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 사랑의 특성은 첫째로 전체적인 사랑입니다. 자신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배우자만이 나의 사랑이고 나만이 또한 배우자의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불가분의 사랑입니다. 부부 사랑은 죽음 외에 그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부는 단순한 인간끼리의 맺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9,3-9 참조). 네 번째는 출산하는 사랑입니다. 부부 사랑은 둘만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열매인 자녀들을 낳고 그들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교육하는 자녀 사랑을 포함합니다.
자녀 사랑과 교육
부모는 하느님께 받은 권위와 책임을 가지고 자녀를 보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녀 교육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가정에서 자녀 교육의 중심이 되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며, 그 사랑은 부부간의 사랑이 바탕을 이룹니다. 성장해 가는 자녀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의 가치관, 습관과 태도, 생활 방식이기에 부모는 자녀에게 생활의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고 개성을 살려 나가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행동이나 진로를 자녀에게 강요하기보다 자녀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이해하면서 바른길을 제시하여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녀의 인생에서 학업이나 취업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 진실한 생활, 진리에 대한 감각과 추구,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 등은 신앙 생활을 통하여 더욱 훌륭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신앙 교육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해 주고, 그 신앙에 따라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미사에 참여함은 물론 자녀의 교리교육과 성사 생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자녀들은 자기를 낳고 길러 주신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효성스런 마음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합니다. 특히 부모의 노후를 정성껏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은 단지 물질적인 배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시간이 많고 마음은 있어도 할 일이 없으며, 사랑은 많으나 줄 수 없어서 외로워합니다. 부모와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자주 만나고 함께 대화하며 세대를 이어 가는 사랑을 돈독히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효도일 것입니다. 또한 부모와 조상들의 기일을 기억하여 기도를 드리고, 필요하다면 제사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국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효도 행위로 보고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형제 자매간의 우애를 두텁게 하고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며, 자녀를 낳아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교육함으로써 계속적으로 사회를 육성하기 때문에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나눔은 사회로 확대되어 서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데 본보기와 자극이 됩니다. 또한 가족간의 인격적 일치는 사회 안에서도 지역간 계층간의 장벽을 헐고 화해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앞장 서며, 모든 법과 정책이 언제나 인간의 생명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도록 힘씀으로써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작은 교회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정 교회라고 합니다. 가정 교회는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께서 이루신 성가정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드러내고 증언하며, 사제나 수도자가 될 후보자들을 양성하는 못자리 역할도 담당하여야 합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부부 사랑과 자녀 사랑으로 깊이 맺어진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 자녀를 낳고 교육하며 사랑을 쌓아 가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계획이 더욱 완전히 실현되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또 다른 역할은 사회 발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에 참여하는 것도 가정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우리 가정의 화목을 가로막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적어도 한 주, 또는 한 달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온 가족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 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진정한 인간 관계가 그리운 날」에서)
우리가 ‘그 한 사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만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이웃의 ‘그 한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만인의 ‘그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만, 동시에 사회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난 다음에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공기를 마시며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좋은 면에서든지 나쁜 면에서든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왜곡된 세태에 알게 모르게 젖어 있던 타성도 과감하게 떨쳐 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지한 자세로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형제애를 키워 가야 합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할 책임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아무도 혼자 고립되어 살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 ‘인’(人)자를 둘이서 서로 기대는 관계로, ‘인간’(人間)을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좋은 사이를 맺어야 하는 존재로 풀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교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 따라, 나이나 성별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 주장이나 종교적 입장에 따라 편을 가름으로써 매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사회 혼란은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와 안녕을 해치고 결국 사회 전체에 커다란 불행을 낳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형제적 관계로 존재하며,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공동 운명체로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질서와 조화를 갖춘 인간 사회를 이루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각자가 속해 있는 가정과 학교, 직장과 단체에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웃과 사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곧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이해 관계, 이념이나 사상을 뛰어넘어 서로 협력함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도시와 농촌은 하나의 생명 공동체임을 인식하여, 농어촌 생산자는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마음으로 건강한 먹을 거리를 생산하여 공급하고, 도시 소비자는 농어민들이 적정한 가격을 보장받도록 협력함으로써 그들의 수고에 보답하고 우리 생명을 지키는 농어촌을 살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족끼리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던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임을 깨닫고, 형제적 사랑과 나눔의 정신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데에도 한몫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과 여과되지 않은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소비 문화를 정화하여 인격을 닦고 인성을 키울 수 있는 건전한 문화 생활을 정착시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윤 추구와 능률주의와 업적주의의 그늘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버림받은 아이들과 노인들, 미혼모와 매춘 여성들, 불의하게 천대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데 앞장 서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 실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는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평등이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악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병폐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사회가 주는 것도 아니며 법률이나 관습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성에서 흘러 나오는 모든 인간 권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유린하거나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해치는 정치 제도나 사회적 관행은 마땅히 개선되어야 합니다. 모든 정치인과 공직자가 정의롭고 공정하게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일은 우리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과 사회에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현세 질서에 불어넣어야 한다는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자가 속해 있는 분야에서 공동선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 권력자들이 하느님의 법을 존중하고 인간의 권리를 수호할 때 그 권위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권력이나 인권을 침해하는 법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으며”(로마 13,3),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복종하여야(사도 5,29 참조)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애의 구현
오늘날 인류 사회는 물질 문명의 발달로 풍요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공 위성과 언론 매체, 교통 수단의 발달로 거리감이나 시간 개념이 줄어들어 ‘지구촌 가족’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국제 관계가 밀접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빈곤 국가의 국민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으며, 국가간에는 인종 분쟁, 무역 분쟁, 군비 경쟁, 종교 분쟁 등 끊임없는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등하여야 할 자리에 불평등이 자리잡고, 균등한 분배의 자리에 독점이 파고들어 인류 공존과 평화를 위협하고, 나아가 인류 공동체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국가들을 돕고 군비 축소와 전쟁 억제를 위하여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현대인,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입니다”(사목 헌장, 1항).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여야 합니다(야고 2,17 참조).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며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13-16참조).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을 안겨 주는 교회와 함께하는 신앙인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구현하는 사회인이자 세계인이 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일원이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형제애를 키워 가도록 노력하며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또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지역간, 계층간, 성별간, 종파간의 편견을 버리고, 부정과 불의를 부추기는 어떠한 유혹도 단호히 거부할 것을 결심합시다.
우리 주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때 죽을 것을 살아났다. 지금부터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 욕심만 부리고 살 것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하면서 살겠다.” 하고 다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생명 자체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 곧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노력과 재물 등을 나누어 주고 또한 이웃에게서 나누어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0-33).
삶의 조건인 노동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노동은 인간 삶의 조건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노동을 하셨고 그분의 제자들도 모두 노동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각지로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도 필요한 것은 손수 일해서 마련하였고(사도 20,34 참조),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에게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 먹도록 하십시오.”(2데살 3,12)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고 제공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의 신성함을 인식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지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모든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를 이루어 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직업 윤리
인간 사회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직업이 있습니다. 인간은 다양한 직업을 통하여 각자가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고 실현합니다. 따라서 직업은 귀천을 따질 수 없으며, 부정하고 불의한 일이 아니라면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인간 사회를 이루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직업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재산에 따라 계급 의식을 갖는 것은 인간 생활의 한 가지 수단일 뿐인 재물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데에서 비롯한 잘못된 풍조입니다. 지상 생활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재물을 모으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양 온갖 물욕에 집착할 때 인간 사회는 불안해지고 갖가지 부정과 부패와 범죄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됩니다. 앞에서 읽어 본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재물에 아예 무관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를 경계하고 하느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마태 6,24 참조).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재물을 많이 가질수록 점점 더 탐욕과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답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직과 연대의 권리
노동의 주체와 목적은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위하여 노동이 있는 것이지 노동을 위하여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해치는 노동 행위나 경제 활동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노동을 통하여 단순히 기본적인 의식주를 얻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도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에 알맞아야 함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는 사회 질서와 경제 정의를 요구하고 지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 안에서 서로 긴밀한 의존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각개인의 능력은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충분히 발휘될 수 있기 때문에, 경제 분야에서 조직과 연대는 효율적이고 질서 있는 생산과 공급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직업별·직능별 단체를 결성할 자연적 권리가 있음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공동선을 위한 노사 협력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노동 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공동선에 입각하여, 그리고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가 함께 존중되는 가운데 합리적으로 해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일할 권리와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사회 보장 등의 사회적 혜택을 받을 권리,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파업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의 대가로 노동을 제공하고 사용자를 올바르게 대하며 공공의 이익을 존중하는 노동 조합 활동을 할 의무도 지니고 있습니다.
기업가는 단순히 이윤의 증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선익을 위한 경제 활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노동자에게 적정한 임금을 지불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하여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기업의 장래를 보장하는 투명한 경영을 하는 가운데 일자리를 보장하고, 좋은 품질의 상품을 공정한 가격으로 공급하여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유권과 그 한계
재산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는 것은 축복이며 좋은 일입니다. 재화 자체는 선하신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원칙적으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를 독점하거나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는 일은 죄악입니다. 재산의 소유권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소유권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결과에 대하여 남들이 간섭할 수 없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재산은 사회적 성격도 띠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인간이 함께 이용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과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하며, 합법적으로 소유한 재산이라 하더라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익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알맞은 수준을 넘는 여분의 재산을 자선이나 애덕에 사용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자기가 쓰고 남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요긴한 것까지도 나눌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나눔의 삶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진정으로 내 것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하느님의 것이며, 나는 그저 그것을 하느님으로부터 위탁받아 관리할 뿐”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픔은 나눌 때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 때 커진다고 합니다. 소유의 기쁨은 잠시뿐이지만 나눔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루가 12,33)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가진 것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기꺼이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노동은 우리 자신은 물론 가정과 사회를 위하는 수고이고, 형제애를 실현하기 위한 발판입니다. 재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기꺼이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도 많지만 한두 군데라도 정기적으로 찾아보거나 후원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메뚜기가 “우리 내일 또 놀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니?” 하고 물었습니다. 메뚜기가 내일에 대해 아무리 설명하여도 하루살이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깊어져 개구리가 “우리 내년에 또 만나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지?” 하고 물었습니다. 개구리가 내년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지만 메뚜기는 통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를 살다가 죽는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해를 살다가 죽는 메뚜기가 내년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일과 내년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임종을 앞두고 “여보게, 우리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세!” 한다면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 25,31-40).
죽음이라는 숙명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죽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죽음 앞에서는 제왕의 권력도, 억만 금의 재물도, 천재의 두뇌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쌓아올린 소중한 것들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기에 슬픔과 고통이 따릅니다. 또한 죽음은 단 한 번뿐이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죽은 다음의 경험을 들려 주는 사람도 없어 죽음에 대하여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며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죽음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의 고비에서는 무신론자나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절대자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
우리의 삶에서 선하고 곱고 참된 것들이 죽음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더 고귀하고 영원한 것으로 피어나리라는 희망과 확신이 있어야만 우리는 평생을 땀흘려 일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양심을 지키고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것도,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도,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희망과 확신이 전제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으로 옮겨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시간인 인생에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감(요한 16,28 참조), 곧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셨고,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활기찬 삶을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심판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악한 사람은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고 착한 사람은 떳떳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적이고 현세적 안목에서 볼 때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행위의 대가를 이 세상에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대에서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 없이 드러나면서”(2고린 5,10) 그에 대하여 총결산을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께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사심판’(私審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롭고 공정한 판정에 따라 우리는 각각 천국과 연옥과 지옥이라는 상벌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이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였는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만이 모든 행위를 가늠할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육신의 부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 16,27) 하시면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세상과 인간 구원의 역사가 마침내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는 죽은 모든 이도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1고린 15,13-14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간 부활의 원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의 육신을 지니시고 부활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영광스러운 특성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요한 20,19-20).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고린 15,52-53).
공심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이와 죽은 이를 포함한 온 인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공심판’(公審判)이라고 합니다.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요한 5,28-29).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특수한 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다만 씨앗일 뿐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하느님을 “얼굴을 맞대고”(1고린 13,12) 보는 것이며, 하느님의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므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아무도 가져가지 못할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어 자라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고자 다시 오시리라 굳게 믿으며 복된 희망을 가지고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인간의 지혜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 13,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라.”(마르 13,33) 하신 예수님의 분부대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그 날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어 모든 인간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죽음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삶을 반성하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