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공동체 약사(略史)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필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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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 캔버라에 한국인이 처음으로 거주한 것은 1962년 한국과 호주간 대사급 수교를 통해 주호주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소되면서이다.[1] 1969년 숙련기술인력 이민 프로그램 하에 첫 한국인 이민자들이 시드니를 통해 입국하게 되었고, 1971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호주 내 한국인 거주자는 468명으로[2], 베트남 종전 후 1975년을 기점으로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된다.

 

1970-1980년대 : 1973년 휘틀람(Whitlam) 노동당 정권의 백호주의 폐지 후 전문기술자를 비롯한 파월 기술자 500여명이 비자 간소화 정책에 의해 관광비자로 호주에 입국한다. 1975년부터 1,000명 이상으로 이민자들이 급증하고, 1976년, 1978년, 1979년 프레이져(Fraser) 정권의 체류기간 초과자에 대한 ‘사면령’을 통해 당시 호주 거주 중이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영주권 취득 및 한국 내 가족을 초청하게 된다. 또한 동 사면령 이후 남미 체류자 및 중동 취업 근로자들이 입국한다. 197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주 내 한국인 거주자는 1,460명, 1986년에는 9,285명으로 급증한다.[3]

 

1980-1990년대 : 1980년 이후 입양, 가족초청 이민, 취업, 사업, 투자 이민, 유학 등으로 이민 인구가 급증했으며,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매년 평균 1,400여명이 호주에 입국한다. 1991년 인구조사에서 한인 인구는 20,580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시기까지도 캔버라에는 대사관 직원과 가족 등을 비롯한 소수의 유학생들만이 거주하고 있었다.[4]

 

[1] 1961년 10월 총영사관(시드니) 대사관으로 승격, 1962년 2월 1대 대사(이동환) 부임(시드니 거주), 1966년 2월 대사관 캔버라로 이전.

[2] 주시드니 한국 총영사관, 호주의 한국 교민 현황.

[3] 주시드니 한국 총영사관, 호주의 한국 교민 현황.

[4] 대한민국은 1980년대까지 순수 목적의 해외여행을 위한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일반인이 해외에 나가려면 기업의 출장, 학생의 유학, 해외취업 등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했다. 정부는 1983년 1월 1일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하여 200만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1회에 유효한 관광여권을 발급하였다. 본격적인 해외여행의 전면 자유화는 1989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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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 천주교 신자는 7가족 30여명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이재문 수녀를 중심으로 모임이 시작됐다. 시드니 패딩턴의 성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 성당 루크 피론(Luke Pirone) 신부에 의해 1976년 11월 7일 첫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었다.[1]

1970년대 말이 되자, 시드니대교구에서는 한인 이민자 사목에 적임자를 찾았고, 이에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2]가 한인사목을 맡게 된다. 골롬반 선교회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꾸준히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해왔고, 1970-74년 한국 선교 경험이 있는 시드니 골롬반 신학교 책임자(Rector) 노엘 코놀리(Noel Connolly) 신부[3]를 1978년 4월 16일 한인 공동체 전담신부(Chaplain)로 임명한다. 1980년 10월 노엘 신부가 떠나고 호주인으로서 상당기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프랭크 페리(Frank Ferrie) 신부[4]가 부임한다.

 

 

 

 

 

 

 

 

 

 

 

 

 

 

<황 프란치스코 페리(Francis John Ferrie) 신부, 2020년 11월 9일 선종>

 

프랭크 신부는 1957년 4월부터 한국의 춘천교구 등지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에 헌신했으며, 이미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1980년 시드니 노스 투라마라(North Turramarra) 소재 골롬반 신학교 재정담당 및 시드니 한인 공동체를 맡아 1984년 4월 30일까지 제3대 주임 신부로 한인신자들의 사목과 호주정착을 도왔다.

 

[1] 시드니 한인 천주교회, 본당 연혁, http://www.sydneykcc.org, 2020년 11월 1일 검색.

[2]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크리스찬 해방과 전인류 화해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교회에 의해 여러 민족들에게 파견되어 오로지 외방선교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회헌 101조)

[3] 1969년 사제서품, 1970-74년 한국 선교, 1978년 4월 16일~1980년 10월 11일 시드니 한인 공동체 전담.

[4] 1930년 11월 24일 호주 빅토리아 무니폰즈(Moonee Ponds) 출생, 1948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입회, 1955년 12월 멜번 세인트 패트릭 사제서품, 1957년 4월 한국 파견 춘천교구 강릉본당, 정선본당 주임신부, YCW(YOUNG CHRISTIAN WORKERS',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 1980년대 호주 귀국 시드니 노스 투라마라(North Turramarra) 골롬반 신학교 재정담당 및 시드니 한인 공동체 주임신부(Chaplain) 임명. 1980년 10월 12일-1984년 4월 30일 시드니 한인 공동체 사목. 1985년 한국 선교, 본당 사목 및 수도회 소임. 2009년 1월 은퇴, 2018년 8월 제주 골롬반 선교회 피정센터 담당. 2020년 11월 9일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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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30일자로 소임에서 물러난 프랭크 신부는 이듬해 선교활동을 위한 한국으로의 재입국을 준비한다. 이 시기 캔버라에 거주하던 주호한국대사관 김재규(요셉) 참사관[1]과 부인 김민선(글라라)씨는 시드니 한인성당을 오가며 프랭크 신부의 캔버라 방문을 추진한다.

프랭크 신부는 1984년 5월 27일(주일) 캔버라에 있는 참사관 공관[2]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 자리에는 대사관 직원 및 참사관 가족 4인, 교민 정하욱(도밍고) 가족 3인, 이정웅(바오로) 가족 5인, 김갑중(리카르도) 가족 4인, 이동욱(프란치스코) 부부, 유학생 류지철(요한) 가족 4인, 강종순(요셉) 부부 등이 참석하였다.

 

[1] 서울 출신(1938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주독 3등서기관, 주케냐 1등서기관, 주호 참사관, 주스웨덴 참사관, 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 주우간다 대사(1989.04.18.), 외무부 본부대사(1992.02.12.), 주이란 대사(1996.03-1998)

[2] 현재는 주호한국대사관 대사관저로 재건축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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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신부의 첫 한국어 미사가 있고 나서, 6월 5일(화) 신자 가족이었던 이정웅(바오로)씨의 아들 이준서[1]군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프랭크 신부는 장례예식을 위해 재차 캔버라를 방문했고, 6월 7일(목) 브래든에 있는 St Patrick’s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한다.

프랭크 신부는 캔버라-골번대교구 총대리 존 알로이시오 몰간(John Aloysius Morgan) 주교[2]를 통해 한인들의 월례미사를 켐벨(Campbell)에 있는 성 토마스 모어 성당(St Thomas More Parish, 군종교구 관할)에서 거행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프랭크 신부는 1984년 말까지 매월 캔버라를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했고, 이듬해인 1985년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

후임자인 피터 켈리(Peter Julian Kelly) 신부[3]는 프랭크 신부와 마찬가지로 매월 캔버라를 방문하여 네번째 주일 미사와 공동체 모임을 정례화한다. 피터 신부는 시드니 한인 이민자 담당 자격으로 캔버라에 방문하여 주일미사와 유아, 성인 세례식 등을 집전하였는데, 세례 받은 신자들은 속지주의(屬地主義)원칙[4]에 따라 세례기록을 세례 받은 성당(켐벨)에 두었지만, 속인(屬人)적으로는 사제파견이 이루어진 시드니 한인성당과의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피터 신부의 방문시기부터 캔버라 공동체는 행정적으로 시드니 한인성당에 속한 공소(公所,secundaria)[5]가 된다.

 

[1] Joon Seo Lee, 1984년 6월 5일 사망, Gungahlin Cemetery, Mitchell, ACT.

[2] 호주 멜번 케일러(Keilor) 출생, 1934년 7월 15일 사제서품, 제2차 세계대전(1942-45) 파푸아 뉴기니 군종사제 파견, 1969년 3월 6일 캔버라-골번 대교구 보좌주교 임명, 동년 5월 29일 군종교구장 임명, 1985년 1월 2일 은퇴, 2008년 5월 21일 선종.

[3] 1938년 호주 멜번 딥데인(Deepdene) 출생, 1963년 7월 27일 멜번 세인트 패트릭 사제수품, 1964년 한국 파견, 원주교구 교구장 주교 비서, 고등학교 영어교사, 기술-상업 고등학교 건립, 고아들을 위한 자활센터 래그 피커스(Rag Pickers) 설립. 1985년 호주로 돌아와 시드니 한인 공동체 주임신부(Chaplain), 이주 아동들을 위한 한국어 학교 설립, 공동체 커뮤니티 센터 건립을 위한 토지 등을 조달(실버워터 스타니슬라우스 성당 St Stanislaus Church, Silverwater). 1984년 5월 1일부터 1991년 4월 10일까지 시드니 한인 공동체 사목. 이후 중국 선교. 2005년 호주 귀국, 2018년 빅토리아 에센돈(Essendon) 거주.

[4] 가톨릭 교회는 집에서 가까운 성당, 거주지 행정구역에 있는 성당에 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교회법 제518조 참조).

[5] 공소는 본당(本堂)보다 작은 교회 단위로서 본당 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며 사목하는 사목구 내 한 구역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로 신자들의 모임 장소를 뜻하기도 하며,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서만 성사(聖事)가 집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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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한인성당 제4대 주임 피터 켈리 신부의 재임기간 중(1984년 5월 1일-1991년 4월 10일) 캔버라 공소 인가(認可)[1]가 이루어지고, 이후 캔버라에는 시드니 한인성당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우들이 주일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된다.

 

1984-1990년대 : 공동체 초창기 가정 순회 미사로 시작되었지만, 캔버라교구와의 협의를 통해 캠벨성당을 빌려 미사를 봉헌된다. 매월 시드니 사제들이 방문하였고,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들과 신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미사를 봉헌했던 시기이다.

 

1990-2000년대 : 한국에서는 해외여행 자유화로 인하여 해외 이민이 촉진되고, 1991년에는 시드니 한인 성당에 한국인 전담사제 장영식(토마스) 신부가 파견된다. 이 시기 시드니 한인성당은 늘어나는 한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본당 부지 마련과 성전 건축 등을 병행하게 되면서 양적, 질적 성장이 이뤄지게 된다. 1996년 12월 성전 완공까지 사제들은 공소사목에 충실하기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신상욱(토마스) 신부는 꾸준히 매월 캔버라 공소를 방문함으로서 캔버라 교우들이 사제들의 열성적인 사목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에 열심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2000-2010년대 : 한국에서 호주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시기이고, 유입인구에 따라 시드니 한인성당도 늘어나는 신자들을 위한 성사사목과 청소년 사목을 위해 2002년 한국으로부터 보좌신부 파견을 받게 된다.[2] 시드니 한인성당의 성장세는 오히려 사제들의 캔버라 공소방문을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고, 공소방문은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캔버라 신자들은 전담 사제의 필요성을 재차 건의했고, 2005년 부임한 윤성균(가브리엘) 신부는 이듬해 유학중인 권세진(알베르토) 신부를 캔버라에 머물게 하면서 학업과 사목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다. 10개월 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권신부는 신자들을 위해 공동체 전례, 기도모임, 피정 등의 신앙교육에 매진하였다.

 

[1] 시드니 한인 천주교회, 본당 연혁, http://www.sydneykcc.org, 2020년 11월 1일 검색. 켈리 신부의 재임시기(1984년 5월 1일-1991년 4월 10일) 중에 캔버라 공소가 설립된 것으로 기록.

[2] 2007년에는 2보좌 신부까지 3명의 전담사제가 시드니 한인성당을 사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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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호주 인구조사에 따른 ACT(Australian Capital Territory 수도준주, 이하 캔버라)의 한인 인구는 2,000여명으로 추산되었고, 영주비자 취득 및 유학, 취업 등의 이유로 한인 이주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1] 2009년 시드니를 사목방문한 대전교구 유흥식(라자로) 주교는 날로 증가하는 한인 이민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감안하여 캔버라에 새로운 사제 파견을 준비한다. 유주교는 캔버라-골번대교구 마크 컬러리지 대주교와의 만남을 통해 캔버라에 한인 공동체 설립 및 전담 사제 파견을 결정하고, 2011년 1월 12일 대전교구 정기 사제인사 발령을 통해 유정의(바오로) 신부를 초대 주임 사제로 임명한다.

 

 

 

 

 

 

 

 

 

 

<유정의(바오로) 신부, 초대 캔버라 사목구 주임>

 

본당, 또는 본당 사목구가 신설되는 조건은 교구장 주교의 권위 아래, 관할 지역에 거주하는 신자들과 이를 책임지는 전담 사제의 파견이 이루어짐으로서이다.[2] 유정의 신부의 파견은 한국 대전교구와 호주 캔버라대교구 양측 교구장 주교들의 합의에 의한 것으로 유흥식 주교의 ‘캔버라 신설’ 인사는 곧 캔버라 한인 공동체 사목구[3] 설립의 근거가 되며, 사제인사 발령일은 캔버라 본당 사목구(공동체)의 설립일이 된다.

 

[1] 도시 계획에 따르면 ACT 준주정부는 2050년까지 80만 인구를 목표로 트램과 산업, 서비스, 거주시설을 늘려나가고 있으며, 캔버라는 2013년 3,567명, 2014년 3,634명, 2018년 4,296명으로 한인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시드니 총영사관 통계 참조.

[2] 교회법 제515조에 따르면, “본당 사목구는 그 사목이 교구장 주교의 권위 아래 고유한 목자로서의 본당 사목구 주임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로 정의된다.

[3] 본당은 보편적인 가톨릭 교회를 이루고 있는 조직적이고 지역적인 부분교회 혹은 단위교회라고 할 수 있고, 교계제도상 주교의 권한에 속하는 교구 내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역사회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기초적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단위교회가 본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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