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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rawkkim

인물 소개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지혜 11,26)

캔버라에는 1948년 유엔 파리 총회 ‘대한민국 승인’ 과정의 숨은 공로자 두분이 잠들어 있다.

이같은 사실은 허동현(스테파노,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교수가 한국과 바티칸 수교 50주년을 맞아 ‘숭실사학 제30집’을 통해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 외교와 유엔(UN)’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간략하게 바티칸을 통해 이뤄진 대한민국 정부 승인과정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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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이뤄졌음에도, 그때까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장면 박사를 대표로하는 유엔 대표단을 1948년 유엔 파리 총회에 파견한다. 당시 미국은 1948년 9월 21일에서 12월 12일까지 열린 유엔 총회를 통해 회원국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기까지 공식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1]

 

구체적인 유엔 총회 승인의 지원은 바티칸으로부터 있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47년 8월 초대 주한교황사절로 패트릭 번 신부(1949년 4월 17일 ‘가제라’ 명의 주교)를 임명하고, 그해 10월 19일 그의 입국과 동시에 ‘한국을 한반도의 합법적 독립국가로 인정한다’고 발표함으로서 유엔 승인 이전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정부로 인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대한민국이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투표에 참여한 55개 회원국 중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는 데에도 바티칸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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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대표단과 대통령 특사단.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활란, 장면, 조병옥, 모윤숙.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 [정일형·이태영 박사 기념사업회]

[1] 1948년 8월 한국에 부임한 ‘존 무초’도 대사가 아니라 대표였으며,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한 것은 1949년 4월이다. 존 포스터 덜레스(훗날 미 국무장관)는 주한특사 ‘무초’를 파리로 불러들여 한국 승인 외교를 지원토록 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2] 1948년 총회에서는 한국 내 외국군대의 철수가 결의되었다. 1949년 10월 21일 유엔 총회 293호 결의(IV)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합법적으로 건국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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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수석대표를 비롯한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기에 제3차 유엔 총회가 열린 파리 샤이오궁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1948년 12월 7일 대한민국 대표단 초청안이 가결되기까지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에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승인의 당위성을 회원국 대표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 채 못될 만큼 짧았고,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정국 불안과 국론 분열, 소련 대표 비신스키를 비롯한 공산 진영의 고의적 지연작전으로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대표단의 활동에 장애를 가져왔다.

 

따라서 대한제국 시대 여권을 참조해 만든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을 지니고 프랑스로 떠난 장 수석대표를 비롯한 대표단 8명은 직업 외교관들을 상대로 국가 사활이 걸린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교섭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비오 12세 교황은 1947년 장 수석대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번 신부를 특사로 한국에 파견, 국제 관례상 바티칸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비춰지도록 함으로써 한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서 큰 힘이 되도록 했다.

 

또한 장 수석대표는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당시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생제(Singer Pierre, 한국명 성재덕, 성가소비녀회 설립자)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순례를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호주 시드니대교구 오브라이언 보좌주교[1](훗날 캔버라-골번대교구 교구장)의 도움으로 당시 호주 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였던 짐 플린스코트를 소개받아 당시 유엔총회 의장인 호주 대표 에밧을 설득하는 데 성공, 한국 승인을 이끌어낸다.

 

허 교수는 “당시 장면 수석대표를 유엔 특사뿐 아니라 바티칸 특사로 파견했다는 것은 바티칸이 대한민국 정부 승인 막전막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만약에 건국 외교가 유엔에서 승인을 받지 못했다면 6ㆍ25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이 파병될 근거를 찾기 어려웠을 테고 파병도 성사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1] 본래 부주교(Coadjutor Bishop)는 교구장의 사망이나 은퇴로 인한 유고시 교구장을 자동적으로 승계하는 주교를 일컫고, 보좌주교(Auxiliary Bishop)는 교구장으로서의 승계권이 없는 주교를 말한다. 장면 대표를 만날 당시(1948년) 오브라이언 주교는 시드니대교구의 보좌주교(Auxiliary Bishop)로 서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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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인명사전[1]에 따르면, 호주 출신의 에리스 마이클 오브라이언 주교(O’Brien Eris Michael, 1895–1974)는 가톨릭 주교이자 역사학자로 소개된다. 1895년 9월 29일 NSW 콘도블린(Condoblin)에서 출생한 그는, 1901년 가족들과 시드니로 이주하여 캠퍼다운과 채스우드에서 초등교육을 받는다. 이후 밀슨스 포인트의 성 알로이시오 고등학교, 스프링스 우드에 있는 St Columba 신학교, 맨리 성 St Patrick’s College에서 사제양성과정을 마치고 1918년 11월 30일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 수품 이후 1918년부터 시드니 맨리 St Patrick’s College(1921년)와 St Columba 신학교(1924-27년)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던 중에 시드니대교구의 요청으로 벨기에 루벵 가톨릭대학교(Ph.D., 1936), 더블린 국립 아일랜드 대학교(M.A., 1936)에서 유학을 하게 된다. 당시 NSW 주교들의 지향에 따라 사회과학과 정치경제를 연구하고 돌아온다.

 

이후 시드니에서 사목활동을 이어가던 중, 역사학자 Stephen Roberts의 요청으로 시드니 대학에서 호주 역사를 가르치게 되는데(1947-48), 이때 버트 에밧 박사는 오브라이언 신부에게 Pacific School of Australia Administration(시드니 대학 부속과정)에서의 강의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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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s O’Brien, Archbishop’s House, Parkes ACT>

오브라이언 신부는 1948년 4월 6일 Norman Gilroy 추기경으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보좌주교(Auxiliary Bishop) 신분으로 파리 유엔 총회 제3차 회의(1948)와 미국 뉴욕 Lake Success에서 열린 제5차 회의(1950)의 호주 대표단 일원으로 함께한다. 이때 에밧 박사는 오브라이언 주교를 인권(human rights)을 다루는 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파리회의는 성공적이었지만, 예루살렘 문제[2]를 놓고 갈등을 벌인 뉴욕에서의 5차 회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호주로 돌아온 오브라이언 주교는 1951년 1월 시드니대교구의 보좌주교가 되고, 1953년 11월 16일에는 캔버라-골번대교구의 대주교(Archbishop)에 임명된다. 1974년 2월 28일 운명한 그의 시신은 크리스토퍼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1]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Volume 15, (MUP), 2000

[2] 파리 유엔 총회와 뉴욕 총회의 주된 이슈는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승인’ 여부를 다루는 자리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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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베레 에밧(Evatt, 1894년 4월 30일-1965년 11월 2일)은 1894년 4월 30일 NSW 이스트 마이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호주의 정치인이자 판사였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호주노동당(ALP) 당수, 야당 당수, 1941년부터 1949년까지 법무장관과 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1930년부터 1940년까지 호주 고등법원 판사를 지냈다.

 

시드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1924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NSW 입법의회에서 일정기간(1925~1930) 활동 후, 스컬린 정부에 의해 1930년 고등법원에 당시 나이 36세로 임명되어, 법원 역사상 최연소 지명자로 남아있다. 혁신적인 법관으로 여겨졌으나 1940년 연방의회 선거를 위해 법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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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ert Vere Evatt, National Portrait Gallery, Parkes ACT>

1941년, 노동당이 존 커튼 총리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에밧은 1949년 연방 선거에서 정부가 패배할 때까지 커튼과 벤 치플리 총리 하에 법무부장관과 외교부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는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유엔총회 의장을 지냈으며,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마련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엔총회를 이끌었던 에밧 박사는 1965년 11월 2일 캔버라의 Forrest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은 워든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공교롭게도 캔버라에는 대한민국의 UN총회 승인과정에 연관된 오브라이언 대주교와 에밧 박사 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캔버라를 찾는 이들이 대한민국 유엔승인 과정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그 과정에 함께한 이들의 숨겨진 공로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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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Brien, Eris Michael (1895–1974) by Elizabeth Johnston,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Volume 15, (MUP), 2000

  • Evatt, Herbert Vere (Bert) (1894–1965) by G. C. Bolton,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Volume 14, (MUP), 1996

  • 김영호. 2014. “대한민국의 건국외교”, 제35권 2호. 43-72.

  • 허동현. 2009.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수석대표 장면의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1권.

  • 허동현. 2013. “대한민국 건국과 유엔(UN)" 『숭실사학회』 제30권 25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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